불교에는 ‘생자필멸’이라는 설화가 있습니다. 어떤 가난한 여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는 부잣집에 애 낳아주기 위해 시집을 가서 사내아이를 낳았습니다. 아들을 낳은 여인은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7살 때 갑자기 죽었습니다. 엄마로서 자식 잃은 슬픔도 컸지만, 아이가 죽어 자신의 행복도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거의 반 실성한 이 엄마는 죽은 아들을 안고, 기원장사로 가서 부처를 만나, ‘아이를 살려 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 때, 부처가 이 여인을 불쌍히 여겨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저 시내에 가서 사람이 한 번도 죽지 않는 집에 가서 겨자씨를 한 움큼 얻어오세요.’ 그 여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겨자씨가 아이를 살리는 무슨 비방이라는 생각’으로 한 걸음에 마을로 달려가서,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물었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 집에 사람이 한 번도 안 죽었는지요? 그렇다면 겨자씨 한 움큼을 주세요.” 그랬더니, ‘아이고 저희 할아버지께서 3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다른 집을 두드렸더니, 그 집엔 할머니가 1년전에 돌아가셨는 것입니다. 또 다른 집을 두드리니까, 그 집엔 어린아이가 며칠 전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움큼을 얻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었는데, 수 백집을 문두드리며 돌아다녀도,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어 계속 돌아다니다가 해질 무렵에 그 저자거리에 마지막 집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겨자씨를 얻으러 가면서 물었습니다. “사람이 한 번도 죽지 않았습니까?” 그랬더니 그 집 주인이 하는 얘기가, ‘에이 여보쇼. 사람이 죽지 않는 집이 어디 있소?”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 순간 이 여인이 깨달았습니다. 생자필멸,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였을 때, 여인은 홀연히 부처가 준 가르침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생자필멸을 운명으로 순순히 받아들일 때, 고뇌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교훈은, 죽은 아들을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죽은 아들이든, 죽은 부모든, 부도가 났든, 병이 났든 상관없이 그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 열반이요 불법(佛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한 번도 죽지 않은 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지만,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자필멸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11:25-26절)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생자필멸(生子必滅)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신자필생(信者必生)하는 ‘영생의 선물’을 모든 믿는 자에게 주셨습니다. 하여, 초대교회에서부터 성도들은 부활을 주님을 기념하여, 유대인의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 후 첫 날인 부활절을 ‘주의 날’로 기억하며 지켜왔습니다. 생자필멸을 ‘신자필생’으로 영원한 소망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