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을 자신들의 삶을 통해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성품을 여러가지로 표현할 수 있지만 그중에 특별히 온유함(gentleness)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온유의 반대는 과격함이요, 성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온유란 분노를 쉬고 다스리는 마음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며,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한 번은 사람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려다 예수님을 협박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서 죽이라 했는데, 당신은 뭐라 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이라 하면, 평소에 늘 죄인을 위해 오셨다는 주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행동이요, 죽이지 말라하면, 모세의 율법을 에수님이 어기는 일이 됩니다. 분노한 군중들의 함성속에, 예수님도 감정에 휩쓸리셨다면, 결코 죄인을 구원하실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그 현장을 떠나셨습니다. 갑자기 허리를 굽히시고, 땅에 뭐라고 쓰셨습니다. 주님이 땅에 무엇을 쓰셨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그 분노의 현장을 잠깐이라도 떠나계셨다는 점입니다. 고개를 숙여, 사람들이 아니라, 땅을 바라보시며, 분노의 현장을 떠나시고,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셨을 때에 지혜의 영이 주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은 고개를 드시고 이렇게 성난 군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렇게 무리의 분노를 잠재우시고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어릴 때, 잘못으로 부모님이 화나셨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현장을 피하는 것입니다. 도망치는 것입니다. 사실, 분노라는 감정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분노호르몬은 15초면 정점을 찍고 15분이 지나면 거의 사라진다고 합니다. 대부분, 큰 사고가 벌어지는 까닭은 그 15분안에 현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15분만 현장을 떠나 있어도, 험한 일은 서로가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5분이 지나도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분노를 곱씹기 때문입니다. 늘 분노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분노의 현장에 머물러 있고, 잊어버릴 만하면..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러면 분노가 커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난다’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노는 생각하지 않으면, 시간과 함께 반드시 사그라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분노의 현장을 피하는 것이 때로 지혜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분노의 현장을 피하셨습니다. 공간적으로만이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분노를 늘 경계하시고 멀리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노를 피하는 것이, 뚯없이 무릎꿇는 복종이나, 운명에 맡겨 그저 체념하는 삶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분노의 현장을 피하셨던 것은, 사람을 두려워해서나 혹은 문제 해결방법을 몰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 모든 문제의 해답을 ‘하늘 아버지에 대한 믿음’안에서 찾으려 하셨습니다. 선악과 의와 불의에 관한 심판의 문제를 모두 주님께 맡기고, 예수님은 쉬지 않고 기도하시면서, 자신에 맡겨진 ‘부르심의 사명’을 향해 달려가셨습니다. 세상 살다보면, 마음이 끓어오를 때가 적지 않습니다. 늘 온유하신 주님을 본받아, 범사에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샬롬. 2018.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