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7년 미국에 이민왔을 때, 저는 처음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에 숫자나 문자 바로 아래에, 울퉁불퉁하게 새겨진 상형문자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누군가, 실수로 잘못 새겨 놓았거나, 무슨 제3세계 문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자세히 보니, 건널목마다 도로 턱이 깍여 있었고, 사거리 바닥에도 울퉁 불퉁하게 양각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애인용 화장실은 시원하게 넓고, 건물 가장 가까운 곳에는 매우 널찍한 장애인용 주차 공간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미국 사회가 제 눈에는 처음에 조금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미국에는 생각보다 장애인들이 많은가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에는 거리에서 장애인을 보기가 드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매우 어리석게도, 한국에는 장애인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건 장애인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장애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사회 환경 때문이라는 사실을 매우 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크게 좋아졌다고 하는데, 제가 미국에 올 때인 1987년만 해도 한국은 장애인들에게 결코 호의적인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장애인 주차 공간과 화장실이 없었고, 시각 장애인을 위해 도로의 턱을 없앤 곳도, 사거리 바닥에 점자가 새겨진 곳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엘리베이터 버튼에 점자도 없었습니다. 이런 환경속에서, 장애인들은 혼자 밖에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자칫 사람들에게 놀림이나 봉변을 당할 수도 있었기에, 모두 집안에 갇혀 살았습니다. 우리는 정말 오랫동안 장애인들을 사회적으로 소외시키며 살아왔습니다.
1987년에 미국에 온 저는, 참으로 부끄럽게도 오랫동안, 해마다 4월 20일이 세계 장애인의 날이요, 그 날을 전후로해서 한국 교회가 장애인 주일을 정해서 지키고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자폐가 있는 조카를 보고, 교우님들 친지분들 중에 있는 장애인들을 보면서, 또 가끔씩 장애 아동을 데리고 교회 오시는 성도님들을 만나뵈면서, 장애인들에 대해 어떻게 교회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작년에 허리 디스크 탈출증으로 보행 장애와, 올해 손목 골절상을 당하여, 후천적 장애를 겪게 되면서, 홀연히 장애는, 선천적으로 겪는 어려움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현재 비 장애인이라고 하더라도, 누구든, 언제든, 장애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주변에 보면,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행 장애, 시각 장애, 청각 장애를 겪는 분들이 많고, 이런 저런 사고를 당하면서, 신체 여기 저기에 장애가 생기신 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신체적 장애만이 아니라, 공황장애와 같이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장애를 겪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과거에는, 장애인의 반대를 정상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장애인의 반대는 비 장애인이라고 합니다. 언제든 장애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보면, 세상에 비장애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주님의 눈에 우리 모두는 건강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요, 죄로 인해, 영적 장애, 정신적 장애, 신체적 장애를 겪는 모두 장애인 병자들입니다. 누가 누구를 차별하거나 멸시하 수 없는 바로 내가 하나님앞에 장애인입니다. 그러므로 장애인을 위하는 것은 곧 나를 위한 길이 됩니다. 늦게나마 ‘장애인 주일’을 시작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서로 사랑을 실천하는 장애인 사역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존귀하게 쓰임받는 동산가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샬롬. 2022.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