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사소한 일로, 승객들간에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말이 오 고가는 사이, 감정이 점점 격앙되어서, 큰 소리들이 나오게 되자, 주변 승객들 이 한 마디씩 합니다. ‘좀 조용히 하고 갑시다. 싸우시려면 교회가서 싸우세요.’ 썰렁한 조크입니다만, 어쩌다, 이런 조크까지 나오게 되었는지, 슬프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 다툼이나 일삼는 모임으로 조롱거리가 되었는지 마 음이 아픕니다. 사실, 미주한인교회들에서 우리 2세들이 1세 교회를 떠나든지, 혹은 신앙 생활을 아예 그만두는 가장 큰 이유중에 하나가, 한인 교회의 분쟁입니다. 어릴 때, 어른 들의 다툼으로 인해, 교회를 옮기면서, 정들었던 친구들과 헤어지게 되는 그런, 가슴아픈 일을 겪게 되면, 신앙 자체에 큰 회의감이 들게 되어, 차후 신앙생활 및 교회생활이 무척 힘들어지게 됩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다툼의 결과, 교회는 제일먼저 신앙적으로 자녀 들을 잃고, 사분오열되어 힘을 잃고 무너지고,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하여 모든 것을 잃 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싸우러 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시시비비, 옳고 그름을 가리면, 시비가 붙 는다고, 교회는 서로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저 한없이 그르고, 못나고 잘못된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죄씻음 받아, 그 은혜에 감사 하는 마음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주님께서 주는 그 용서로 다른 자매를 용서하여, 이 세상엔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가운데 이루는 놀라운 천국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다스리는 ‘참 평화와 기쁨의 천국 공동체’를 이루려면, 누군가 죽어야 합니다. 누군가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누군가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남이 아니라, 내가 먼저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주변에 분노가 사그라지고, 다툼이 그치고, 참 평화와 기쁨의 주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 집니다. 제가 늘 자기 주장을 펼치더라도, 1절만 하라고 말씀드리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드리면, ‘불의한 일을 보고도 가만 있으란 말입니까’라고 항변하시는 분이 계 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 하나 죽어,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할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님 께 영광돌리는 진짜 승리의 길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 자가의 길입니다.
고난주간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말로 에수님을 고 발했을 때, 빌라도가 놀라워할 정도로 아무 변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들은 자기 잘 못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변명하는데 열심을 내거나, 오히려 성을 낼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일 증거가 뚜렷하지 않은데도 아무 변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구 와도 말다툼을 벌이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그가 곤 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은 ‘형제끼리 교회 일로 세상 법정에 서는 것보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고 권면했 습니다. 예수님은 사실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 을 정죄하는 사람들과 말다툼을 벌이셨다면, ‘초록은 동색’이라고, 세상은 누가 옳고 그름 보다도 서로 싸우는 모습만을 보고, 교회 전체를 비웃고 조롱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 고 하나님의 나라는 무너지고 누가 이기든, 모든 것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변호하는대신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내가 죽어 하나님의 의와 평화 를 이 땅에 이루셨습니다.’ 진리로 승리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 모습이 되 기를 소원합니다. 샬롬. 2019.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