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30개월, 그리고 9개월이 된 어린 두 아들의 엄마가 있었습니다. 결혼하기 전 이 여성의 인생 계획표에는 항상 친구, 여행, 연애, 진로에 대한 고민과 결의로 가득 차 있었을 뿐 한 가정의 아내, 아이들의 엄마가 된다는 고민은 없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진학했고, 박사학위의 꿈을 꾸면서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3년동안의 피나는 공부끝에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작성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좀 더 집중해서 박사논문을 완성하면 그 동안 갈고닦은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으리란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마냥 미룰 수 없어서, 결혼을 했고 임신을 했고 아이들을 낳았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얼마든지, 논문준비하고 돈도 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두 아들의 엄마가 되어 보니 육아와 공부를 병행하는 일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됩니다. 귀에 밝고 민감한 둘째는 새벽에도 몇 번씩 깨어 웁니다. 새벽 5시에 둘째가 완전히 눈을 뜨면 어수선한 분위기에 첫째도 같이 잠이 깹니다. 똥오줌 기저귀 갈고, 이유식 만들어 먹이고, 수유하고, 씻기고 입히고 어린이집 데려다주고, 설거지, 빨래, 청소,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려다가 놀아주고 재우고 나면 저녁 9시. 또 다시 쌓인 집안일을 해치우고 잠자리에 들면 밤 11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이들을 보살피다 보니 자신의 삶은 돌볼 틈없이 흘러만 갑니다. 잠을 푹 자본 적이, 친구들과 여유로운 커피 한 잔을 해 본적이 언제였는지, 나 아닌 자식들의 요구를 채우기 위해 엄마의 모든 꿈과 인생 계획과 하고 싶었던 일과, 인간관계와 필요는 다 희생이 된 것입니다.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과 행복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뉴저지 동산교회가 리틀페리에 자체 성전을 가지고 마음껏 소리지르며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은 과거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교회를 개척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교회당을 빌려 예배를 드리다가, 감히 ‘성전 마련의 꿈’을 꾸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교회를 내 집처럼 생각하여 조금씩 건축헌금에 동참했던 손길들이 있었고, 늘 시간이 날 때마다 Bergen county 동네들을 이잡듯이 돌아다니며, 교회당을 찾아다닌 발걸음이 있었습니다. 재정적으로 많이 부족한 상태에서, loan을 얻기 위해 서류를 작성하고, loan officer를 설득하여 loan을 받기 위해 몇 일 밤새워 briefing을 준비한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교회에 입주해서는 창고같은 건물을 예배 공간으로 바꾸기 위해 땀흘려 일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타운과의 소송이 걸렸을 때, 그 복잡한 과정을 불평없이 감당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알고보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모든 축복은 과거 누군가의 ‘피땀어린 희생의 터전’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 ‘천국의 소망가운데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된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때문이었습니다.
가정이나 교회, 그리고 사회나 혹은 국가 공동체라도, ‘누군가의 희생없이, 건강하고 행복한 미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나은 건강하고 행복한 세상을 누군가에게 물려주기 위해, 성전 구입을 시도하려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헌신과 희생이, 후에 누군가에게 큰 은혜와 축복이 될 것을 확신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샬롬. 2014.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