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이 아니라 동심
Not a baby face but a child heart

요즘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좀 더 어리게, 좀 더 젊게 보이려 애씁니다. 정치인들도 쌍커풀 수술하고, 보톡스맞고 얼굴 주름을 제거하면서, 조금이라도 젊게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누구다 어린아이 얼굴, 동안을 갖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얼굴은 동안인데, 마음이 늙은이면 어떻게 될까요? 애늙은이라는 말이 있지요. 몸과 얼굴은 어린이, 청소년, 20대이지만, 말투, 생각, 행동, 가치관 등이 또래들과는 다르게 노인들과 비슷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애 늙은이는 애 어른과는 뉘앙스가 조금 다른 말입니다. 애 어른이, 나이에 맞지 않게, 정신적, 인지적으로 보다 성숙하고 사려깊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면, 애 늙은이는, 당사자의 나이에 맞지 않게, 늙은이처럼 진부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암튼, 얼굴은 동안인데, 마음이 쪼글쪼글- 보기에 추한 늙은이면 누구도 되고 싶지 않은 애늙은이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동안이 아니라, 동심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루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돌이켜 어린아이처럼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처럼 되라는 말은 분명히 어린아이의 동안 피부를 가지라는 말은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동심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나이가 들면, 외모만 탈모에 쪼글쪼글 해지고, 추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도 역시, 탈모에 쪼글쪼글해지고 추해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잠 4:23)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서 생명의 근원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늘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순수하게 주님을 바라보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이 보기에 부러운 동안은 우리에게 일시적 기쁨을 줄 수 있을지 모르나, 늘 좋은 것을 보게 하는 동심은 늘 우리로 하여금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합니다. 생떽뛰뻬리의 ‘어린 왕자’라는 소설에는 행복과 관련하여 늙은 마음과 어린아이의 마음이 어떻게 다른지를 잘 표현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린 왕자가 말합니다. “창가에 제라늄 화분이 놓여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멋진 붉은 벽돌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그 집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어른들에겐 그저,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해야 알아듣는다고 했습니다. 얼굴은 동안인데 마음은 늙은, 애 늙은이가 되면, 사람을 척보면 돈으로 견적이 나옵니다. 얼마짜리 옷을 입고 있는지 얼마짜리 가방을 들고 있는지, 얼마짜리 신발을 신고 있는지, 그래서 전체적으로 상대가 얼마짜리인지를 가늠하게 됩니다. 그런데 애늙은이는 정작 중요한 그 사람의 됨됨이- 상대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는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사람 됨됨이처럼 사람에게 잘 중요한 것들은 오직 어린 아이의 마음을 가질 때에만 비로소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고, 그것은 오직 마음으로만 볼 수 있는데, 그 마음은 늙고 추한 마음이 아니라, 해맑은 어린 왕자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 놀랍게도, 심령으로부터 새로워져, 어린 아이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분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나이든 사람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앞에 어린 아이가 됩니다. 동안이 아니라, 동심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늘 예수 신앙안에서, 동심을 회복하여, 선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주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데 존귀하게 쓰임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샬롬. 2022.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