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명예교수인 박동규 교수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박동규 교수는 시인 박목월님의 아들입니다.
내가 초등학교 육학년 때 육이오 전쟁이 났다. 어디론가 떠나버린, 아버지를 찾아 우리 가족은 집을 나섰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이렇게 어머니와 우리 삼남매가 아버지를 찾아 집을 떠나 일주일 이상을 헤매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못 찾고,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어머니는 우리들을 위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어머니는 어린 동생들과 보따리를 들고 쌀자루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워주셨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게 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마디가 <쌀자루는 어디 갔니?>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 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오늘은 어머니주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계 102개국 사람들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더니 대답은 하나로 모아졌다고 합니다. “mother(어머니)!” ‘열정, 미소, 영원’등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말들이 있었지만, ‘어머니’라는 단어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우리 부족한 인생에게 ‘어머니’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