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구절은 세 번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우셨고, 멸망이 임박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고, 십자가 죽음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성경에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구절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 언덕 길을 오르신 고통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웃음 코드는 좀처럼 연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예수님은 언제나 진지하고 근엄하고, 웃음기 전혀 없는 엄숙한 얼굴을 가진 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설적으로, “예수님이 세 번 우셨다”는 구절만 성경에 있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눈물은 매우 특별한 경우였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말씀이 없는 것은 어쩌면 예수님께서 웃었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 의미없을 정도로 예수님은 노상 재미있는 분이었고 즐거워하셨고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늘 인상쓰고 말하고 하나도 재미없는 분이셨다면,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없이 5천명이나, 사흘씩 굶어가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따라다닐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보통 어린 아이들의 집중력은 15분이라고 합니다. 15분 이상, 아이들의 주의를 끌려면, 웃음이 있어야 합니다.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흘동안, 남녀노소를 잡아 둘 정도의 언변이라면, 웃음기 하나 없는 슬픔 많은 세상에서, 예수님은 듣는 이로 하여금 배꼽잡게 만드는 만담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실제로, 마가복음 12장에 보면,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기쁘게, 박장대소하며 들을 만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중에, ‘부자가 하늘 나라 가는 것은 마치 약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런 비유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는 별로 우습지 않을 수 있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그 풍자와 해학이 듣는 이들의 배꼽을 잡게 했을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예수님은 늘 유머가 풍성하신 분이셨습니다. 아랍 민담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고 합니다. 날씨가 푹푹 찌는 어느 여름 날, 길가에 죽은 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파리떼가 썩은 개의 사체에 잔뜩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더럽다고 침을 뱉거나,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지나갔습니다. 그 때 수염이 텁수룩하고 눈에 유난히 광채가 나는 한 사람이 한참 동안 개의 사체 옆에 쭈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더니, 다른 이들과 달리 씩 웃으며 말했습니다. “고놈 참… 이빨 하나는 희구나.” 예수님은 늘 슬픔과 고통을 해학으로 풀어내신 분이었습니다. 고통과 슬픔과 괴로움속에서도, 기쁨의 생수를 길어내는 분이셨고, 그런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사람들은 위로받고 새 힘을 얻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기쁨이 충만하신 분이셨고, 그 기쁨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의 심령에 기쁨이 충만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뻐하라’는 말씀이 그리스도인에게,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항상 기쁘게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러나 슬픔 많은 이 세상에서도,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에 순복하려 억지로, 의지적으로 기뻐하려 하면, ‘억지 웃음도 진짜 웃음의 90% 효과가 있다’고, 놀랍게도 억지 기쁨이 마중물 역할을 하면서, 기쁨이라는 감정이 풍성하게 쏟아져 나와, 꽃 피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의 소원대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 심령과 가정과 교회와 하는 모든 일 가운데 늘 예수님의 기쁨이 충만하여, 늘 영육간에 강건한 삶을 누리고 ‘소문만복래’라고 기쁨으로 만가지 축복을 은혜로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