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년전, 세계인의 가슴에 충격을 준 사진 한 장이 미디어에 올라왔습니다. 터키의 한 휴양지 해변가에 인형처럼 작은 한 남자애가 해변 모래에 얼굴을 묻은 채 죽어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IS 전쟁을 피해 유럽으로 가려다 배가 뒤집혀 죽은 시리아 난민, 이제 겨우 3살, 에이란 쿠르디의 시신이었습니다. 그 사진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져 왔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아주 복잡한 감정들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뚜렷한 1가지 생각은, 죄많은 이 세상은 분명 내가 살 집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념이 다르다고 죽이고 죽고, 종교가 다르다고 죽이고 죽고, 인종이 다르다고 죽이고 죽는, 이제 겨우 3살 어린애를 모래밭에 코묻게 죽게하는 이 세상은 분명 내가 영원히 살고자 하는 곳이 결코 될 수 없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 교단 목사님의 손자분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처음 소식을 듣고 참 많이 황망했습니다. 어린 손자를 먼저 떠나 보내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심정은 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리기도 두려웠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여쭙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도서 기자는 뜻밖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전 4:2-3절) 전도서 기자의 말은 이 땅에서 오래 살면서, 온갖 추악한 세상의 모습, 3살짜리 어린애가 해변가 모래에 코를 묻고 죽어있는 모습을 보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주님의 얼굴을 일찍 보는 것이 더 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종 교인들의 눈에는 이 땅에서 잘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부럽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믿는 성도들은 주일날 놀러도 못가고, 술 담배도 끊고, 와인 한 잔 마실 때도 눈치보며 사는데, 불신자들은 세상 온갖 맛집 다 돌아다니며 부어라 마셔라 먹고 마시고, 세계 관광 명소 구경하며 희희낙낙합니다. 우리는 십일조하고, 각종 헌금에, 봉사활동에 돈 쓰고 시간을 쓰는데, 세상 사람들은 오직 자기 자신들만을 위해 번 돈 다 쓰면서,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그리고 RV사서 온 세상을 누비며 돌아다닙니다. 이렇게 예수 없이 사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면, 이게 뭔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신앙생활에 깊은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시편 기자도 이런 세상 사람들의 형통함을 보고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 73:2, 3절)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 재미를 쫒아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바람에 나는 겨와같이 ‘갑자기 전멸’한다(시 73:19절)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신앙은 겨우 120년도 살지 못하는 썩어 없어질 세상 영광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목적합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우리 성도들이 영원히 살 본향이 아닌 것입니다. 사실, 이 땅에서 아무리 잘먹고 잘 산다고 할지라도, 이 땅의 삶은 유한한 것이요, 그 누구도 생로병사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우리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을 알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위에 견실하여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샬롬. 2017.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