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은 서기 11세기에서 13세기 말까지, 회교도에게 빼앗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유럽 ‘교회’가 주도한 수차례의 원정 전쟁입니다. 11세기, 당시 카톨릭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지를 탈환하라는 연설을 통해, 민중과 그리스도 교회를 선동하여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전 서유럽에서 군대가 동원되었고, 이런 움직임은 향후 약 200년간 이어졌습니다. 교황의 명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칼과 창을 들고 예수 이름으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십자군은 전쟁 과정에서, 이슬람 교도들을 무참하게 학살했고, 닥치는대로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강간하고, 포로를 학대했습니다. 이 때, 기독교인들의 만행에 큰 충격을 받은 무슬림들은, 오히려 이슬람아래 더욱 단단하게 뭉치게 되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의 여파로, 중동지역에서의 복음 전도는 오늘날까지 거의 완전히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이, 이교도들도 행치 않을 악행을 서슴지 않고 저지를 수 있을까요?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이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핍박하고 심지어 죽이는 일이 적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특히 종교적으로 열심이 많은 사람들이 더욱 그리 행동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제일 밖에 이방인의 뜰이 있고, 그 안쪽에 이스라엘의 뜰이 있는데, 여자가 밖, 남자가 안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그 다음이 제사장의 뜰인데 그곳에 번제단, 물두멍이 있고, 그 안으로 성소가 있고 성소 안에 지성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 모습에서 주목할 점은, 이방인의 뜰과 이스라엘 뜰 사이에 세워진 두터운 벽입니다. 어떤 이방인도, 이 벽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넘어서게 되면,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고고학의 발달로 근세에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하여 두개의 헬라어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어떤 이방인도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 너머로 들어올 수 없다. 그 같이 하다가 잡힌 사람은 누구든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며, 그에게 대한 책임은 오로지 그 자신에게 있다.’ 입니다. 자신을 하나님 믿는 독실한 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그 열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해하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가, 이방인의 뜰과 이스라엘의 뜰을 나누는 담벼락에 있습니다. 나와 너를 나누는 담벼락을 우리 사이에 세우면, 담벼락 밖에 있는 상대방은 내가 죽여도 무방한 적이 됩니다. 미국을 건설할 때, 유럽 이주자들은 자기들과 미국 인디언들 사이에 두터운 담벼락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담벼락 밖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대했습니다. 수많은 살상이 자행되었습니다. 남북 전쟁 당시, 남부 백인 농장주들은, 아프리카 흑인들과 자신들 사이에 두터운 담벼락을 세웠습니다. 자신들은 담 안에서 밥을 먹고, 흑인들은 담 밖에 세워 두었습니다. 담밖에 세워진 흑인들은, 얼마든지 노예삼고, 때로 강간 살인, 폭행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오려는 흑인들은 잔인하게 억눌렀고, 그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흑인 투표권이 1960년대 와서야 제대로 실천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독일 나치는 유대인들과 자신들 사이에 담을 세우고, 유대인들을 담 밖에 세워 두었습니다. 담 밖에 세워진 사람들은, 얼마든지 신체 실험하고, 사람으로 비누만들고 죽여도 무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 ‘우리의 화평’이 되셨습니다. 새로운 성전되신 예수님의 몸안에서,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죄인들이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었고,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나누는 담벼락이 허물어져 새로운 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로 화평을 이룬 주님을 묵상하며, 우리도 이 세상에서 ‘화평의 도구’로 쓰임받기로 다짐하는 고난주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샬롬. 2022.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