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시대에 하나님께서 질색하셨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은 멀고 입술만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입술로는 늘 주여, 주여를 외치는데, 그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없는 신앙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을 1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짐승의 희생 제물만 잔뜩 갖다 바치는 제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랑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확실히 보여주면서 내가 너희를 이처럼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고 고백하실 때,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도 역시, 저희도 주님을 목숨 다해, 성품 다해, 온 몸 다해,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대를 사랑합니다, 하늘만큼 땅만큼’ 이렇게 고백했는데, 최소한 상대가 ‘저도요, 당신을 많이 사랑합니다.’ 정도의 반응은 있어야 서로 관계가 돈독해지는데, ‘그대를 사랑합니다. 하늘만큼 땅 만큼’ 이런 말을 듣고 반응이…, ‘아 그러세요? 그 사랑 참 감사하네요. 고맙습니다. 그 크신 사랑을 정말 칭찬해 드립니다. Way to go.’ 그리고 나서는, 별로 가타부타 사랑에 대한 기쁨과 감동없이 뭔가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는 일에만 열중한다면, 얼마나 말한 사람이 민망해지겠습니까?
그러나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나를 사랑해 주신 그 놀랍고도 엄청난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에 매이고, 삼켜져 주체할 수 없는 마음으로 ‘저도 주님 정말 사랑해요. 주님이 나의 전부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주님 품 안으로 달려가는 행위가 예배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배 감격이, 무슨 좋은 연주가 함께 하는 찬양이나 감동적인 설교에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예배 감격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안에 이미 이루어집니다. 어릴 때, 학교 파하고 집에 돌아와, 집안에서 할 일없이 심심해서 죽을 정도가 되었을 때, 집밖에서 오매불망 기다리던, 기쁜소식- 복음이 들려옵니다. ‘누구야 놀자.’ 하고 동네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그 때부터 가슴은 콩닥콩닥, 해야 할 숙제도 잊고, 집밖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뛰어나가게 됩니다. 연애할 때에는, 사랑하는 이의 전화벨 소리만 울려도 콩닥콩닥, 그를 만날 생각에 이미 가슴은 한없이 몽글몽글해집니다. 그러므로 감동적인 예배는, ‘누구야, 예배하자’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미 콩닥콩닥, 몽글몽글 한없는 설렘으로 내 심령에 이루어지는 사건이지, 누군가의 억지춘향으로 만들어지는 인위적인 감성이 아닙니다. 누가 예배 연출을 잘해서 설레는 예배가 되고, 누가 찬양 가사를 틀리고, 설교가 심심해서 설렘이 없는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기 연주가 화려하고 영상이 볼만해서 내 감동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는 그 자체로 하나님에 대한 열렬한 내 사랑 고백이기에, 이미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주님의 성전에 나아와 예배드리러 오는 행위가 설레는 것이요, 감동인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마법과 같은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안에서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너가 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상대를 위해 무엇이든 아낌없이 다 베풀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대놓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설레십니다. 그와 연합하여 그에게 모든 축복을 다 쏟아부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늘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그 십자가 사랑안에서, 우리도 역시 주님을 마음다해, 성품다해, 목숨다해, 사랑하여, 신령과 진정의 예배자로, 풍성한 축복을 하나님께 받아 누리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쁘신 뜻을 이 땅에 이루는데 존귀하게 쓰임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샬롬. 2023.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