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술이 오늘같지 않았던 옛날, 아니 불과 5-60년 전 한국만 해도, 아이 낳는 일은 엄청난 고통이었고,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병원가는 일이 흔치 않았을 때, 사람들은 거의 집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 낳는 일을 돕는 산파가 동네에 몇 분 계셨습니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이 땅의 어머니들은 이를 악물고 천장에 매단 끈을 잡고 힘을 주면서 몸이 부숴지는 고통가운데 피를 흘리며 자식을 낳았습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이 애들 말로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출산은 어머니의 몸이 거의 부숴지는 고통 가운데, 한 생명이 태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하면,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사람이 죽기도 했습니다. 때로 난산이 되면, 엄마를 살릴 것인가? 아이를 살릴 것인가? 고민하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 때 어머니들은 자신보다도, 자식의 생명을 선택합니다.
야곱에게는 아내가 넷이 있었습니다. 야곱이 사랑했던 아내는 라헬이었지만, 외삼촌 라반의 교묘한 술책에 말려, 야곱은 14년 무료 봉사의 조건으로, 거의 강제적으로 라헬의 언니 레아도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라, 그에게는 여러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라헬은 요셉 딱 하나뿐이었습니다. 옛날엔 자녀들이 마치 장수의 전통에 든 화살과 같이 어머니에게 매우 큰 힘이 될 수 있는 존재라, 라헬은 늘 자식 더 낳기를 소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라헬을 불쌍히 여기셔셔, 그의 태문을 열어 둘째를 가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나오는 시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벧엘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가던 길에 그만 갑자기 라헬의 산통이 시작된 것입니다. 게다가, 난산이었습니다. 급히 근처 산파를 불러 출산을 하는데, 해산의 고통이 극심하여 아이는 잘 나오지 않고, 산모가 위험했습니다. 그 순간,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아이를 죽이고, 산모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아이를 살릴 것인가의 선택입니다. 그 때 어머니 라헬은 자식을 선택합니다. 그렇게 자식의 생명을 살리고 자기는 죽어가면서, 라헬은 ‘혼이 떠나갈 때, 아들을 베노니라’ 불렀습니다. 그 말을 후에 아버지가 베냐민이라고 고쳐 부릅니다. 베노니라는 히브리어의 뜻은 ‘슬픔의 아들, 고통의 아들’입니다. 고통과 슬픔 가운데 태어난 아들이라는 의미도 있고, 이제 어미없이 살아가야 할 아들이 너무 불쌍해서 어미가 죽어가는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안타깝게 탄식하면서 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라헬의 둘째 아들은, 그렇게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태어난 슬픔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태어난 자식의 이름을, 아버지 야곱의 입술을 통해서, ‘베냐민’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베냐민이라는 뜻은, ‘오른손의 아들, 혹은 축복의 아들’입니다. ‘응애 응애’ 아기가 온 동네 떠나갈 듯 울어제키는 소리에 태어나는 날은 분명히 ‘베노니’ 가장 고통스럽고 괴로운 날이지만, 동시에 그 날은 아기 생명이 이 세상에 첫 선을 보이는 베냐민, ‘가장 복되고 행복한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베노니-슬픔과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베냐민- 생명과 축복을 이루십니다. 하나님께 예수 십자가는 베노니입니다. 기묘자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날은 십자가상의 처절한 죽음이 역사하는 하나님께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베노니 가장 슬픈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날은, 우리 모든 죽을 수밖에 없는 영혼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어 다시 태어나는 베냐민 가장 행복한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어머니 주일, 자기 몸을 부숴가며, 우리를 이 땅에 낳아 주신 어머니께 감사하는 하루가 될 수 있기를 바라고, 동시에, 그 어머니를 우리에게 주시고, 또한 자기 몸을 부숴가며 우리에게 영적인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만만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샬롬. 2023.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