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에 살 때, 가깝게 교제했던 존경하는 목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분은 한국의 최고 명문대에 다니실 때에, 복음에 붙들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예수를 모르는 같은 과 동기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상대는 길길이 뛰었습니다. 그런 ‘-소리’는 집어 치우라고 여러 사람들앞에서 험하게 모욕했습니다. 수치심에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상대는 막말을 해댔습니다.
그 동기에게 다시는 ‘예수 예’자도 꺼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로는 대학 졸업 후 만날 일이 없었습니다. 정초에 3일간 신년 심령대부흥집회를 통해, 강사목사님을 통해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도들이 가장 좋아하는 설교 주제는 축복, 격려, 위로 설교입니다. 그리고 제일 부담스러워하는 메시지는 헌금, 지옥, 전도입니다. 사람들이 전도라는 주제 설교를 힘들어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도 메시지안에 십자가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처럼 내가 죽지 않으면 전도는 어렵습니다. 상대에게 때로 모욕과 수치를 당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전도할 수 없습니다. 복음전도는 십자가에 내가 죽어야 가능합니다. 십자가는 누구든지 어렵습니다. 예수님도 피하고 싶어 ‘피땀흘리며’ 고민했던 주제가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없고, 생명도 없고, 복음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 신앙은 아직도 예수 복음을 모른 채, ‘지옥불을 향해 달려가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주님과 함께 내 자존심과 내 목숨을 십자가에 매어달고,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상대가 누구든 복음을 전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뜻밖에도 하나님의 때에 상대방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약 10여년 전 제가 목회지를 버지니아에서 뉴저지로 옮기게 되었을 때, 이곳에서 한 신학교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도 한국의 최고 명문대를 나와서, 대기업에서 일하다가, 뒤늦게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님이 되시고 신학대학교 교수님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과 우연히 식사하면서, ‘전도’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과거 자기 대학시절에 전도받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자기 반에서 자기 눈치를 보면서, 복음을 전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자기에게 복음을 전해서, 다시는 자기에게 말도 못꺼낼 정도로 ‘-망신’을 준 적이 있었다고 술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를 만나게 된다면, 사과하고 싶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얼추 생각해 보니, 버지니아에 계신 목사님과 교수님이 서로를 아실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망신을 주셨던 분의 이름을 여쭈었을 때, 예상이 맞았습니다.
버지니아에서 목회를 잘하시는 바로 그 목사님이셨습니다. 성경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고전 3:6)다고 말씀했습니다. 누군가 대학시절에, 자존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망신을 당할 각오로 복음을 전했던 분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물을 주었고,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올해 동산교회 표어는 ‘한 영혼을 주께로’입니다.
오늘 십자가 지고, 망신을 당하며 전하는 복음이 별 효과없어 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전하면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때를 따라 과실을 맺게 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신년 부흥회 강사 목사님의 메시지처럼, ‘헌금 봉투에 그 어떤 기도제목보다도 제일 먼저, 전도대상자 한 영혼’의 이름을 올려 기도하는 것도 좋은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샬롬. 2015.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