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한국은 남존여비 사회였습니다. ‘남자는 존귀하고, 여성은 비천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회 분위기속에서 여성은 매우 불공평한 대우를 받아야 했습니다. 오래 전 한국에서는 보통 남자들끼리 먼저 밥을 먹고, 여성은 따로 밥을 먹거나, 혹은 남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남자들은, 밥상머리에서 반찬 투정하고, 아내를 맘대로 부리는 하녀처럼 대할 때가 많았고, 심지어, ‘북어와 여성은 삼 일에 한 번씩 때려야 한다’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인간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하고 못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약한 어린 아이들의 지위도, 여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부모에게 맞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고, 학교에서도 선생님께 노상 이런 저런 일로 매를 맞으며 자랐습니다. 돈이 없어 육성회비를 내지 않았다고 매를 맞고, 공부를 못했다고 매를 맞았습니다. 가난한 게 매 맞을 일이었고, 다른 아이보다, 시험 점수를 못 받은 것이, 매를 맞을 이유였습니다.
집안에서, 쫒겨나면 갈 데없는 연약한 아이들은, 부모의 횡포에 굴종할 수밖에 없었고, 어른들의 폭압을 말없이 견뎌야 했습니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하고 못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모두가, 자기보다 약한 자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며 살았습니다. 폭력뿐만이 아니라, 폭언도 언제나 난무했습니다. 남편은 늘 아내와 자식들에게 반말이었고, 돈있고 힘있는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약한 자들을 하대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별별 욕으로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고,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피해자는 언제든 또 다른 가해자가 된다고, 어른들에게 매맞고 상처받은 아이들은 상급생은 하급생을 때리고, 동급생 가운데서도 약한 아이들을 골라 언어 폭력, 신체 폭력을 행사하여, 망가지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하고 못된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약자들에 대한 강한 자들의 폭언과 폭행으로 인해, 오늘까지도 그 후유증이 적지 않은데, 사실 반천의 구별이 엄연했던 옛날에는 이런 차별과 폭압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여성과 어린아이는 아예, 인구수에 들지도 못했습니다. 여성과 아이들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보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힘없고, 키 작고, 색깔이 검고, 병들고, 장애를 갖고 있고, 더럽고, 추한 사람들을 업신여깁니다. 과거 땅콩 회항이 대표적인 경우였습니다. 돈이 권력이고, 외모가 능력이 되어,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강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세상에 오셔서, 병든 자, 장애인, 가난하고 못 배우고, 힘없고 키 작은 사람들, 죄인들, 세리들, 삶에 지친 모든 사람들을 스스로 종의 형체를 가져 낮아지시어 사람들의 더러운 발을 씻겨 주심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입니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답은 차치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아예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삼가 작은 자 중 하나도 업신 여기지 말고,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장애인 주일입니다.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 사이에서 지극히 작은 자들입니다. 신체 장애인, 정신 장애인 모두 어린이처럼 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은 예수 믿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지극히 작은 소자’를 예수님처럼 섬기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어쩌면, ‘장애인에게 베푼 은혜는 곧 영적 장애인인 내 자신을 치유하고 온전케 하는 치유의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샬롬. 2023.4.30.